가름비. 계절과 계절을 가르는 비가 있습니다. 그 비가 내리고 나면 어느새 한 계절은 자리를 내주고 새 계절이 슬그머니 우리들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죠. 언제부터인가 그 비의 존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슬쩍 저 좋을 대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가름비.
주말에 내린 비가 그 가름비였을 겁니다. 이제 가을입니다. 새 천년 첫 가을. 거창한 수식어와 달리 이 가을이 지난 가을과 무엇이 다를까 싶습니다만 그래도 자란 한 살 만큼, 보낸 한 해 만큼 세상 속에서, 사람살이에서 풍요로움을 찾고 싶은 마음은 더 깊어졌습니다.
다행히 사무실 제 자리 뒤켠으로 풍성하게 감이 열린 감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주렁주렁 매달린 감은 어제 저녁 내린 빗방울을 아직 채 떨구지 못했습니다. 잠시 의자를 돌려 그 감나무를 바라보노라면 참 마음이 편해집니다. 저 수많은 감 중에 단 한 개라도 내 것일 수 없는 게 현실일지라도. 비로소 열매는 먹기 위한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때론 마음을 채울 수 있다는 이 낡은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한 마음 닦은 셈칩니다. 그래서 이 가을은 어쩌면 작은 행운이라도 데려올지 모른다 싶습니다.
가름비가 내리기 전날 사무실 부서 자리 이동이 있었습니다. 2층에 있던 우리 <작은이야기> 팀은 3층으로 올라왔습니다. 2층에 있을 땐 출입구 근처라서, 개인적으로는 회의탁자가 뒤켠에 있어서 그리 안정적인 자리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에 비하면 지금은 무척 즐거운 자리입니다.
제 자리 바로 뒤켠으로는 창문입니다. 창가엔 작은 화분을 서너 개 두었습니다. 그 창문 바깥쪽으로는 베란다가 있습니다. 아담하지요. 그 베란다에서 감나무가 손에 달듯 말듯 있습니다. 더욱이 주변에 다닥다닥 건물이 붙어 있지 않아서 나름대로 눈에 하늘을 담고 한 호흡할 만한 공간까지 있습니다. 작은이야기팀 자리도 3층 맨 끝 쪽에 있어서. 한팀 같은 분위기가 물씬 납니다. 그래서 더욱 뭔가를 잘 하고 싶기도 합니다.
나를 감싸주는 주변이 이처럼 평화로워 보여도 또 다른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습니다. <작은이야기>에 온 지 1백일이 갓 지났습니다. 처음에 품었던 여러 생각은, 현실과 부딪치며 그럭저럭 마음 밑으로 침전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침전물을 뒤적거릴 시간이란… 그렇죠…. 시간이란 무엇을 기다려주지 않으니까요. 다만, 시간을 다룰 수 있는 마음과 생각과 꿈과 실천을 곁에 둘 수 있다면 그것 역시 가능할 것이긴 합니다만.
마음은…. 어느 정도 준비가 된 다음에 어떤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정말 마음으로 끝나고 맙니다. 비로소 그 자리에서도 부족하진 않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쯤이면 자리를 옮겨야 하죠. 그러면 다시 그 새로운 자리에 맞는 능력을 구하려 노력해야 하고. 그래서 이맘쯤 농담처럼 말 한 마디 던지곤 하죠.
"사는 게 그렇지 뭐…."
학생회 일을 했을 때, 집으로 가는 버스를 땄을 때, 버스 창가에 앉았을 때, 머릿속이 온통 학생회 일로 범벅이 되어 있었을 때, 그때 어떤 생각이 하나 떠올랐고… 무척 기뻐했었습니다. 그때 얻은 깨달음… 고민하면 방법이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생활에서 잠수를 할까 싶습니다.
최근… 인연의 한 줄에 매여 나를 만났던 이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준 것 같습니다. 술 한잔 나누지 못하고… 마음과 달리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전화도, 이메일도, 모든 것을 외면해 버린 듯합니다. 온전히… 지금 내가 좋아서 하는 이 일에 나를 더 깊이 묻을까 싶습니다. 지금 이 모습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데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마흔이 넘은 어느 날, 가볍게 어디론가 떠나 진실로 시간에 쫓기지 않고 살 때 찾아오는 사람들을 반겨 맞을 수 있는 그 여유가 있는 날처럼…. 사람을 대할 수 있을 때까지… 그저 잠시 동안….
가을을 잘 탑니다... 그래서 아침에 이런 낙서를 해보았습니다. 즐거운 바람을 하나씩 가지고 이 가을을 맞이하길 바랍니다. (200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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