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을 며칠 남겨 두지 않은 10월 30일. 방금 원고를 청탁했다. 아직도 한 군데 남아있다. 기분이 멍하다. 휩쓸려 가는 마감이다. 누군가 나를 휩쓸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냥 내게 휩쓸리고 있다.
아침 9시에 출근해 신영복 교수, 통기타 가수, 문인 세 명을 찾아 전화통에 호소했다. 그리고 그 긴 호소의 결말은 오후 6시에 일단락 됐다. 신영복 교수 원고청탁 실패는 오후 2시 무렵 제주도의 용포형 도움을 얻어 확인했다. 아마 용포형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밤까지 갔을 것이다. 개인 연락처가 없고, 연구실 전화도 좀처럼 받지 않는다.
이미 학과 사무실로 팩스는 오전 9시 30분 무렵에 넣었다. 지난 주 제주도에서 가진 강연회를 정리해 실을 수 있게 해달라고. 답변은 충분히 예상했다. 지난 해 6월 원고청탁을 하러 팩스를 보내고 불쑥 찾아가 만났을 때도 그랬다. 글에 대한 나름의 원칙이 있는지라 이번 부탁 역시 그 원칙에 위배된 사항이었나 보다. 그럼에도 꿀꿀한 점은 통화를 할 수 없었다는 것.
문제는 문화특집이었다. 총 네 꼭지 중에서 세 꼭지가 섭외가 되지 않은 상태다. 내가 기획한 것인데도 기획부터가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 청탁도 시큰둥하다. 통기타 가수. 정태춘 씨를 섭외 했으나 역시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 계속 직접 연락이 되지 않는다. 유익종씨에 이어 이주호 씨로 이어져 오후 2시께 마무리되었다. 책을 발송하고 팩스를 보내고….
나머지 한 명, 문인. 문화 특집의 여는 글을 써 줄 사람이다. 지난 주 한 문인과 통화를 했으나 마감 일정이 맞지 않았다. 주말을 보내고 오늘. 누구를 할까 고민하다가 소설가 김영하씨와 통화했다. 한 10여분 얘기를 나누었다. 써 주고 싶은데, 통기타보다는 재즈가 훨씬 좋단다. 통기타 음악의 반복성- 마치 트롯처럼 신곡보다는 흘러간 노래를 재탕하는 듯한 그런 분위기가 싫단다. 그러니 글을 쓸 수 없는 거다.
작게는 가치관이고 크게는 사상인데 그것을 거스르고 글을 써 달라고 할 수는 없다. 문화 특집의 주제와 어긋나니 다음을 기약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른 작가 역시 바쁘다는 이유로 퇴짜. 또 다른 작가는 출판사에서 연락처를 알려 주지 않는다. 우이 씨~. 이제 누굴 하지.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들어간다. 시 분야, 소설분야, 비소설(에세이) 분야를 줄기차게 써핑 한다. 그럴 만한 글을 써 줄 사람…. 피곤하고 귀찮아진다. 그냥 내가 써 버릴까 싶다. 차라리 취재가 쉬울 듯하다. 오후 5시 무렵. 한 시인이 눈에 들어온다. 연락처를 구해 연락했다. 다행이라고 할 수밖에. 그리고 나니 다시 불현듯 물음과 다짐이 던져진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작은이야기> 6개월 생활 평가를 하자.
1. 무엇을 하려 왔나
6개월 전, <말>에서 서둘러 이곳으로 왔을 때 뭔가를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만이 아닌 사람과 사회, 사람과 자연의 관계 속에 있는 <작은이야기>를 발굴하겠다는 거였다. 우리네 삶의 근원을 담을 수 있는 이야기로 꾸미겠다는 거였다. 그런 내용을 사설이나 주장이 아닌 감성적인 얘기들로 풀겠다는 거였다. 그러나 내 안에 확고한 주제가 없었고, 그것을 표현할 만한 능력 - 필자를 섭외하는 것까지-이 없었다. 이에 나를 제외한 <작은이야기> 팀이 가지는 한계 역시 있었다. 물론 <작은이야기> 팀의 한계는 나를 평가하는데 결정적일 수는 없다. 다만 참조사항일 뿐이다.
5월 이곳에 오면서부터 시작했던 것이 개편이었다. 책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 몇 번의 회의와 리포트 등을 주고받으며 설정한 게 ‘자유, 상생, 나눔, 나’였다. 자유로움과 더불어 사는 상생과 나눔, 그리고 삶의 근원인 나에 대한 사색과 성찰….
그런 흐름 아래 8월호는 개편되었다. 그러나 매달 고민에 빠졌다. 기획하면서, 청탁하면서, 원고쓰면서, 이 꼭지는 어떤 주제에 부합하나! 등의 고민이 떠나질 않았다. 물론 잡지 한 권을 구성하는 모든 꼭지가 그 잡지의 방향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내용을 담을 수는 없다. 모든 내용들이 잡지의 주제 안에 부합해서 한 권의 잡지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약간씩 들고나는 주제들이 엮여서 한 권으로 엮이는 게 잡지다. 다만, 그 들고나는 폭을 얼마로 둘 것인가가 고민스러운 부분이고, 이를 최대한 좁힐 수 있게 조율하는 게 잡지팀이 해야 할 일이다.
이런 고민은 기존의 <작은이야기>가 가진 성격과 부딪혀 엉성한 모양을 띠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보건데, 이곳에 올 때 가졌던 생각은 지극히 도식적이었다. 지나치게 제목에 연연했고, 그동안 <작은이야기>가 걸어온 역사에 대한 부정이 강했다.
<작은이야기> 캠페인 ‘당신이 희망입니다’는 내가 가진 여러 고민을 함축하고 있다. 이 캠페인은 우리 사회에 희망이 되는 사람을 찾아 소개하고 그를 돕기 위한 후원금을 받는 방식이다. 그러나 매번 회의 때마다 누구를 희망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그래서 11월호 기획회의를 하던 자리에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한 글을 제출했다. - 나는 이처럼 어느 팀에서 팀원들이 서로의 의견을 가능한 솔직하게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에 동의하고 안 하고는 별개의 문제인 거고.
‘당신이 희망입니다’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고민스럽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작은이야기>에 어울리는 당신이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는 일이, 연인을 고르는 일보다 더 힘들다. 더욱이 당신이 가진 그 희망이란 어떤 빛깔인 것인지 궁금하다. 그래서 정리해 본다. 그냥 잡담처럼… 그래서 하나마나한… 그럼에도 내게는 도움이 되는….
군인이 찾는 애인, 꿈을 가진 오빠, 장애인 오빠 돌보는 미영이, 내게 희망를 주는 나, 봉숭아 꽃물 준 그,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 가르치는 아이들, 어머니 돌보는 여인, 엄마에게 희망주는 아이, 직장생활에서 환한 동료 직원. 대부분 일상에서 소박하게 느낄 수 있는 이들이다. ‘나’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들이 곧 희망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소개하고 이들을 위한 기금을 모집한다면 반응이 어떨까. 캠페인이라고 내세울 만한 사회적인 이슈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캠페인으로서는 ‘아니올시다’일 것이다.
아무튼, 그럼에도, 이들은 우리의 따뜻한 이웃들이다. 이보다 조금 각도를 달리하자면 신문 지면에 미담으로 실릴만한 분들을 소개할 수도 있겠다. 독특한 방법으로 분리수거에 솔선수범인 주부 아무개씨. 몸이 불편한 이웃집 할아버지를 돕는 중학생 소녀 아무개양 등 충분히 희망으로 추천해도 손색이 없지 않을까?
제도 안에서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들과, 제도를 바꿔가며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은 제도만을 바꾼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여건에서 작고 따뜻한 마음을 실천하려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제도개혁에만 의지하며 ‘투쟁’적인 사람이, 사랑하는 연인들에겐 절대적 희망인 ‘애인’이 <작은이야기> 기사에서 말하는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추구해야 할 ‘희망’은 제도와, 성실한 실천이 조화를 이룬 개인이다. 싸울 때는 싸우고, 자신의 몸뚱이로 돌볼 일은 돌보는 그런 사람. 나쁜 제도는 그대로 둔 채, 개인의 텃밭만 열심히 가꾸면 어느 순간 제도가 바뀜으로 인해 깡그리 짓밟힐 수 있다. 장애인을 돌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토대가 되는 장애인고용촉진법을 개선하려는 이들이 우리의 희망일 수도 있다. 그런 문제로 정부와 다투는 이들이 희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은이야기>에 맞는 ‘희망’은 선별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변혁을 위해 큰 소리를 내는 잡지가 아니다. 그야말로 작고 - 부피와 무게가 아닌 근원 - 낮은 곳에서부터 그런 힘을 찾아가야 한다. “생활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는 건 거대담론이 아니고 구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큰 것만을 지향하는 이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반기”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를테면, 우리는 환경을 다루더라도 환경연합의 최열 총장은 배제한다. 그의 공과를 논하기 이전에 이미 그는 거대인물이 되어 버렸다. 기왕 소개를 한다면, 최열 총장보다 성과는 조금 덜 하더라도 비전을 가지고 환경운동을 하는 무명인을 발굴하는 것이 낫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제도의 변화와 사람의 실천이 결합된 인물을 찾는 것이 의미 있다. 대통령 한 명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제도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정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강하게 낼 수 없다. <작은이야기> 독자들은 그런 목소리에 익숙하지 않다. 취재원 기획 과정에서 이런 ‘희망인’은 배제하여야 할 것이나, 만일 취재를 한다면 그런 목소리를 어떻게 독자들과 눈높이 할 수 있는가는 기자의 몫이다. 똑같은 주제를 어떻게 전달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작은이야기>다움에는 긍정적인, 밝은 빛깔이 어울린다. 그러나 그것은 취재원에 대한 선입견으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 동성애( 또는 성매매여성)는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다. 그렇다고 그런 문제를 다루는/실천하는 이들을 기획단계에서 배제해서는 안 된다. 그 대상자가 어떤 빛깔을 띠고 그런 활동을 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욕심이 된다면 그 희망이 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 ‘사람’ 역시 희망다운 사람이었으면 한다. 대개 단체를 취재하다 보면 일은 희망인데 사람이 희망이 아닌 경우를 접할 수가 있다. 그럴 경우 난감하다. 또한 취재에서, 기사작성에서 ‘일’과 ‘사람’을 조화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내가 취재한 <나와 우리> 김현아 대표 기사는 기사로서는 실패했다. 개인 김현아의 사고와 생각, <나와 우리>가 추구하는 일과 방식은 충분히 희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기사에서 이 둘을 조화롭게 연결하지 못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찾는 희망의 주제는 ‘인권(자유권과 사회권)과 평화’가 아닐까. 최근 몇 년 사이 급부상하고 있는 시민사회 단체들. 이들은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흐름이 되고 있다. 앞으로 이들의 힘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들의 힘은 단지 사회 변화에서만 흐르는 것은 아니다. 사회 전반에 이런 인식이 반영될 것이다. 이미 대부분의 기업체는 환경을 생각하지 않고는 제품을 만들 수 없다.
오히려 친환경성을 강조하기 위해 ‘녹색’이란 용어를 어떻게 넣을 수 있을지 골몰해야 한다. 중․고등학생들은 그들의 자유권을 외친다. 10월호 ‘그때 그 녀석’의 그 아이들 역시 교권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고, 1318의 인권을 찾기 위한 행동이다. - 내가 고등학생일 때만 해도 그런 행동은 날나리들의 행동으로 보였다. 이처럼 사회가 바뀌면 인식이 바뀐다. 최근의 북한으로 넘어간 장기수들만 보아도 그렇다.
이런 모든 흐름을 말해 줄 수 있는 주제가 인권과 평화다. 작은 것을 무시하지 않는 힘, 천천히 가는 삶을 인정해주는 힘 등이 그런 것이다. 착한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자신을 희생해 나누는 아름다운 사람을 찾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것을 계속 고집할 이유가 없다. 다만 캠페인을 하려면 캠페인답게 기획을 세워야 하고 아니면 그냥 고만고만한 따듯한 이야기들로 담고 가자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역시 결정된 사항은 없다. 그래서 여전히 고민하고 방황할 따름이다.
불․행․하․게․도․이․글․역․시․여․기․서․일․방․적․으․로․중․단․한․다.
오늘 저녁, 새로 자리를 맡은 편집장이 새 방향을 밝혔다.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작은이야기>를 떠날 때가 아닌가 생각했다. 아직 답은 못 얻었는데.
아무튼 개편 아닌 개편이 진행될 것 같다. 그 개편이 되고 나면 내가 이렇게 주절주절 쓰는 게 별 의미가 없다. 내가 발언할 이유도 없고 할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고민 역시 여기서 일방적으로 중단한다.
새로운 편집장의 개편 방식이 - 방향은 논외다. - 불만이지만, 그건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다만 오늘 이후 <작은이야기>로 내 삶을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어설픈 운동을 얘기했던 - <작은이야기>로 하겠다는 게 아니라 <작은이야기> 류의 운동이다. - 것도 접으련다. <인물과 사상>을 상대로 폈던 반론 역시 상당부분 수정할 수밖에 없다. 두세 달 후에 나의 이 판단을 반성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다만 한 가지만 기억해 두고자 한다. 발행인이 술자리에서 그랬다.
“<작은이야기>는 휴머니즘이라고.”
쓰다만 이 글이 소제목들은 2. <작은이야기>는 독자들에게 돌려주자. 3.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 4. 이제 무엇을 할래? 였다. (2000.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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