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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0+31

31과 12분의 10

 


응급실 

아버지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 며칠 전 응급실에 치료를 받고 되돌아갔는데, 이번에는 허리와 목을 움직일 수가 없다는 거였다. 응급실. 의사들은 파업중이니 그저 이곳에라도 있는 게 다행인가 싶다.

그런데 두어 시간이 지나도 진찰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의사들이 있는 접수대 근처에 가서 서성이다가 물었다. 그때서야 환자를 찾고 다시 진료를 한다. 엑스레이를 찍으면 결과가 언제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이번 응급실에서 배운 점은 자꾸 보채야 그나마 차례를 찾을 수 있다는 것. (2000.10.5.)



월세로 시작하는 신혼

쌀쌀한 가을 저녁 기운에 밀려 <말> 기자 구영식(나는 이 친구를 ‘구’로부른다)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마감이 다 끝났다며 근처에서 술이나 한 잔 하잔다. 못 이기는 척하고 공덕동 <말> 사무실로 갔다. 불교방송사 건물에서 옮긴 사무실이지만 마감 분위기는 여전했다. 다들 자리에 앉아 제 기사들 정리하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두루두루 인사했다. 한두 마디씩 나누고는 구에게 가니 마감에 밀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전화로는 다 썼다고 하더니, 90%정도 썼단다. 잠시 수다를 떨고는 한 시간을 기다리기로 한다. 그동안 미술팀에 가서 수다를 떨고는 빈 컴퓨터 앞으로 와서 인터넷을 하며 시간을 죽였다.
 

그냥 편하다. 다른 기자들이야 마감에 바빠 ‘손님대접’이 없어도 서운하지도 않고, 나 역시 그리 서먹하지 않다. 다만, 뭔가 미묘한 감상들이 내 안에서 인다. 이 시간까지 남아 기사를 작성하는 이들, 몇 달 전까지나 역시 이 안에 있었지만 - 이들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일까. 언뜻 들여다보니 삼성, 동성애, 노동운동 등이 다뤄질 모양이다.


중요한 것인데…. 어느새 나는 그런 것들에 관찰자로 돌아서 있다. 이게 무서운 거다. 현장에서 떠났다고 해서 잊어지는 것, 더욱 무서운 것은 단순히 잊혀지는 것 자체가 아니다. 잊혀지는 것마저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다른 무엇에 빠져 버린다는 거다. 어찌 보면 잊혀지는 게 아니라 밀리는 거다. 그냥 사람마다의 현실적인 일들에 시나브로 밀리는 것일 뿐이다.

9시를 조금 넘겨 구는 원고를 마쳤다. 둘이 밖으로 나와 근처 술집으로 갔다. 해물찜에 소주를 주문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게 중에 재미있었던 것은 새신랑 구의 신혼살림을 꾸린 집을 구한 얘기. 이차저차해 돈은 없고 해서 은행융자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보증인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이러저러해 의사인 친구에게 부탁해 겨우 승낙을 얻었는데, 빌리기로 한 하루 전날 그 친구의 부인이 말리는 바람에 그도 무산…. 결국 전 직장인 <길> 사장을 찾아가 돈을 꾸었단다. 아무튼 그러해서 집을 얻었는데…. 월세란다. 4천만원짜리 전세인데 돈이 모자라 월세로 살고 언제든 돈이 마련되면 전세로 변경해주겠다고 주인이 그랬단다.


이쯤에서 ‘청년 갑부’인 내가 - 주변에 영세한 봉급 생활인들을 보니까 본의 아니게 내가 이렇게 돼 있었다. - 한 소리 했다.

“그래 너는 둘이 버는 데도 월세로 살고 나는 혼자 벌어도 3천3백만원짜리 전세에 산다.”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그래도 남는 씁쓸함이 있다. 서른 넘어 결혼한 맞벌이 신혼부부들의 첫 출발에 놓인 경제적 토대의 빈약함, 그것이 씁쓸했다. 그럼에도 구가 행복해 보이니 이 또한 인간사의 재미다.

느지막이 온 미술팀 수정선배는 이제 나에 대한 화를 풀었나보다. <말> 나간다고 했을 때 나를 거들떠도 안 보았다. 세월이 약이라고 해야 하나. 참 그놈의 정 때문이겠지. 술자리는 밤 12시가 넘어 끝났다.(2000.10.12.)



팽 당한 핸드폰

핸드폰이 말썽이었다. 두어 달 전부터 가끔씩 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뭐 굶어죽게 생겨서 그런 것도 아니다. 배터리에 충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 모양이다. 급기야는 먹는 만큼 힘도 못 쓴다. 몇 시간 지나면 배터리 기력이 쇠해진다. 고민 끝에 배터리를 갈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4월 핸드폰을 구입했었다. 용산에서 가입비 포함해 4만원인가 주었을 거다. 배터리는 한 개. 그리고 1년 7개월. 19개월이 지났는데 이게 이대론 더 이상 못 살겠다고, 죽겠다고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데모를 하는 거다. 그래 배터리를 새로 사야했다.

휴대폰 매장엔 하루가 다르게 신제품이 나온다. 그 속에 과연 내 핸드폰 배터리가 있을까. 서비스센터에 전화, 기종이 SHP3100인데요. 배터리가 있나요? 저쪽에서 잠시 조회한다.


“우리 쪽엔 없고 서울에는 용산에만 있습니다.”

놀랍다. 컴퓨터로 전국의 잔고분이 모두 확인되나보다. 정말 놀라운 것은 내 예상이 맞았다는 것. 기종에 맞는 배터리가 서울에서 단 한 곳밖에 없다니. 용산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가격 3만8만천원. 그래 3만8천원이면 다시 19개월 정도 버티려나… 뭔가 아깝다.


집으로 오는 길가. 핸드폰이 6만원이란다. 그래 까짓껏 번호야 바꾼다고 크게 문제될 것 없다. 들어가서 문의해보니 딱 한 종 있는데 보상판매란다. 그래서 11만 7천원. 쓰던 전화번호를 쓸 수 있단다. 한 5분 망설이다 ‘그래! 쏜다.’ 서류에 몇 가지 적고 나니, 채권비가 별도로 1만원이 든다. 그래서 1만원 내고 구 핸드폰 돌려(?)주고 새 폴더 핸드폰 받고 나왔다. 11만7천은 월 할부로 총 12개월에 걸쳐 내면 된다. 9,750원씩. 불쌍한 내 구 핸드폰. 데모 잘못했다가 아예 정리해고 당해 버렸다. 팽 당한 거다. (2000.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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