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올해 할 일 가운데 한 가지를 출판으로 계획했다. 어떤 책을 낼 것인지는 이미 정리된 터였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서른 살’이다.
10년 전인 1999년, 내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서점에 갔다. 그곳에서 서른살이 거론된 소설책을 10여권 정도 구입했다. 그리고는 며칠을 작정하고 그 책들을 읽었다. 나름대로 서른살의 의미를 찾고 싶어 취한 '의식'이었다.
이십대들에게 ‘서른 살’은 나름 기대를 갖게 하는 고개마루다. 내 서른 살과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의 서른 살들이 맞는 그 고개마루는 여러모로 다를 것이긴 하다. 무엇보다 취업이 쉽지 않고, 취업을 해도 게 중 절반은 비정규직이다. 생활 기반이 불안하니 서른 살들의 삶 또한 그기대치가 조금은 덜할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서른 살은 삶에서 몇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번에 작정한 출판은 새롭게 쓴 글이 아니다. 내 서른 살에 <세상풀이>에 쓴 글을 모으는 방식이다. 서른 살부터 서른 세 살까지, 서른 살 초반에 쓴 세풀에는 당시의 내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삶 가운데, 일, 사랑, 사회참여를 중심으로 글을 간추렸다. 여기에 일상의 단편을 군데군데 담았다.
써놓은 글을 책으로 엮겠다고 정리하다보니 새삼 서른살의 의미가 새로웠다. 10년을 지나와 보니 무엇보다 서른 살에 세상과 잘 관계하는 게 중요했다. 서른 살 그때 가졌던 생각의 방향이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이다. 이는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생각이 그러했고, 소통하려는 세상의 방향이 그러했다. 노동하면서 엮는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저 서른 살의 습성이 현재까지 고스란히 남았다. 그 서른에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의 방향을 가늠했다는 게 놀라웠고, 그로부터 10년을 지나오면서 한치도 자라지 않은 듯한 의식이 부끄러웠다.
서른 살에 대한 이야기를 엮고 보니 30+31과 32+33으로 나눠 두 권의 책 분량이 나왔다. 약 800면 정도의 분량을 두어 번 정리하여 650면까지 줄였으나 여전히 두 권으로 하기에도 많은 분량이다. 그럼에도 분량을 줄이는 일은 이쯤에서 정리했다. 자신의 글을 스스로 정리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이를 핑계삼아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다.
7월 25일, 6개월 정도 끌어오던 그 일에 쉼표 한 개를 찍었다. 우선 30+31로 나눈 1권에 담길 원고를 출력해 출판사에 넘겼다. 원고를 한번 봐 달라는 의미였다. 지인이 운영하는 출판사라 부담없긴 했는데, 넘기고 돌아오는데 마음이 헛헛했다.
원고를 정리하면서 느낀 뿌듯함과 즐거움이 나만의 것임을 새삼 깨달은 듯 하기도 했다. 혼자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출판은 전혀 다른 얘기다. 출판사는 나름의 기준으로 상품 여부를 따진다. 출판이 이뤄진다 해도 제 3자인 대중들과 교감을 갖는 일은 더욱 어렵다.
주변에서 종종 서른 살들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얘기를 나누곤 하는데 간혹 그런 얘기들이 설교로 흐르곤 했다. 그때마다 그것은 좋지 않은 방식이라 여겼다. 단지 몇 년 더 살았다는 이유로 그렇게 주장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고 싶은 얘기가 없지는 않았다. 곰곰이 따져보니 내 서른 살의 얘기를 그냥 들려주는 게 적절해 보였다. 세풀에 실린 글들을 정리해 건네는 방식을 택한 이유다. 그런 마음이 쌓이고 쌓여 기왕 정리할 거라면 책을 엮자는 데까지 나아갔다.
출판사로 넘긴 원고가 어떤 판정을 받을지는 알 수 없다. 통상적인 흐름을 보면 출판으로 이어질 확률은 눞지 않다. 수많은 출판사에 수십 수백 개의 원고가 쌓이고 게 중에서 몇 개의 원고만이 책이란 이름으로 서점에 놓이는 게 현실이다. 그런 현실을 알기 때문에 원고를 건네고 오던 마음이 헛헛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원고를 넘기는 일는 한번쯤은 했어야 했다. 스스로 연기에 만족하다고 오디션을 포기한다면 그 연기자는 영원히 무대에 오를 수 없다.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는 일은 언젠가는 건널 수 밖에 없는 다리다.
지금도 서점에는 서른 살의 길목에 놓인 수많은 책들이 있다. 대부분 서른 살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한다. 명령처럼 강하지 않더라도 조언의 형태를 띤 채 길라잡이를 자처한다. 그런 책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서른 살들을 가르치려 하는 태도를 이해하기도 어렵다. 더욱이 가르치려는 내용은 대부분 성공을 말하고 있다. ‘너 서른 살, 이렇게 해야 성공하거든?’이다.
출판사에 원고를 맡겨 놓고 차츰 또다른 생각들이 불거졌다. 기존의 방식대로 출판을 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인가! 그것이 즐거운 일인가! 생각이 고이고 고여 출판사의 답변은 기다려야 하지만, 내 나름의 방식으로 책을 만들 계획이 섰다. 우선 주변의 서른 살에게 선물처럼 건넬 책을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출판이라는 공식적인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이쯤에서 스스로 음반을 만들어 팔면서 노래를 부른 장기하가 좋은 본보기다.
서른 살에게 중요한 것은 명령과 지시가 아니다. 더욱이 일방의 형식으로 전달되는 성공의 비법이 아니다. - 그것이 성공의 ‘비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서른 살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사랑하는 방법이다. 비록 취업 못한 서른 살이더라도, 실연 당한 서른 살이더라도, 그들에게 먼저 중요한 것은 자기애다. 성공은 우선이 아니다. 1등에 들지 못한 2등 이하의 서른 살들을 무시하는 성공은 다수의 서른 살들에겐 의미없다.
출판하겠다고 나선 것은 내게 남은 자기애의 또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는 과도한 자기애라는 비판의 여지가 충분하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자기애가 있다. 유명인도 아닌, 사회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한 채 뭇 세인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그런 이의 서른 살을 출판하겠다고 나선 것은 바로 그 이유가 크다.
서른 살들이 자기애를 가질 수 있도록 이번 원고는 '보여주기’에 집중했다. 이번 원고는 마흔에 되돌아보며 쓴 서른 살이 아니라 서른 살이 그때의 삶을 기록한 서른 살이다. ‘인생 선배’라는 세월의 더께가 쌓이지 않았다. 따라서 좀 더 정직하다. 그래서 이 글을 읽다보면 자기애를 갖는 방법이 무엇인지, 자기애가 왜 필요한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기애를 찾는 과정은 서른 살들에게 필요한 성숙의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 삶에서 진정 필요한 것은 성공이 아니다. 성숙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성공을 얻는 과정은 경쟁이지만, 성숙을 이루는 과정은 성찰이다. 삶은 경쟁이 아닌 성찰을 통해 제대로 여문다.
오늘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 쓰는 이 글은 자기위안이다. 또한 이제 마흔 고개를 오르고 있는 내가 성숙하고자 마음을 달래는 성찰의 과정이다.
아! 서른 살들에게 보낼 성숙을 이루는 성찰의 그 길 이름은 <서른의 생태계>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201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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