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2+33

나무로 살지 않을래?

 

1

숲이 내게 말한다.

“나무로 살지 않을래?”

“이미 많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나까지 숲으로 만들려 하다니. 그 무슨 욕심이지?” 

“욕심이라니! 그저 네가 나무로 살라는 건데. 나무로 살며 나무들이 나누는 얘기를 들어보라고 한 얘긴데.”

“나무들이 주고받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 나무들은 모두 숲에 대한 얘기만 할 텐데 뭘. 너를 칭찬한다든가 뭐 그런….”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나무들은 내 얘기를 하지 않아. 나무들은 단지 자신들의 얘기를 하지. 들어볼래? 이쪽 개울가에 서 있는 미루나무 삼형제는 요즘 무척 소란스럽지. 올 봄엔 서로들 더 많은 새싹을 틔우겠다고 며칠 전부터 시끌벅적해. 저기 큰 바위 옆에 뿌리내린 아카시나무는 봄이 오는 게 조금 두려운 가 봐. 지난해 아카시 꽃을 꺾어 가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가 많이 났거든. 하지만 올 봄에도 벌에게 많은 꿀을 나눠준다는 기대도 있지.”

“물론 그런 얘기들도 나누겠지. 하지만 그들은 곧 숲에 대해 얘기를 할 거야.”


“나무들은 숲을 말하지 않아. 나무들은 나무 자신의 이야기만 할 뿐이지.”

“그렇다면 숲은 나무들에게 어떤 존재지? 무엇 때문에 숲이 존재하는 거지?”

“애초 숲이 먼저 존재하진 않았어. 나무들이 모이다보니 자연스럽게 숲이 생긴 거지. 아니,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모여 숲을 이룬 거야. 숲을 만들려 나무를 모으진 않았단 말이야. 지금도 마찬가지야. 나무들이 없으면 숲의 존재도 없어.”

“… ….”  


“만일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제 생각을 바꿔 봐. 숲에 오거든 나무들을 봐. 나무 한 그루가 내뻗은 가지들, 땅에 힘껏 박은 뿌리들의 조잘거리는 수다를 들어봐. 다 듣고 나면 네 눈에 나무가 다시 보일거야, 그 다음엔 숲도 새롭게 보일 테니까.”

“그럼 숲은 스스로 존재 이유도 만들지 못하면서 무슨 의미로 지내지?”


“글쎄. 그걸 꼭 숲이 만들어야 하는 걸까? 이런 건 어때? 나무들은 여름이 되면 짙푸른 옷으로 바꿔 입는데, 그럴 땐 숲은 그냥 초록바다가 돼. 나무들이 옆 나무들과 재잘거리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보면, 곧 숲엔 바람이 가득 차잖아. 혹 비라도 내려 봐. 나무들은 다른 일 모두 제쳐놓고 잎으로 신나게 음악을 연주하잖아. 그땐 숲이 그대로 음악회장이 되는 거야. 그처럼 나무들이 곧 숲이지. 그 정도면 숲이 존재하는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럼 나무들을 위해 숲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니?”

“왜 숲이 나무들을 위해야 하지?”

“나무들은 숲을 즐겁게 해 주잖아.”


“아니야. 나무는 숲에게 즐거움을 주려고 그런 일들을 하는 게 아니야. 나무들은 오직 나무들 자신이 즐거워지려고 하는 것뿐인걸. 나무들은 결코 누구를 위하지 않아. 그냥 자신에게 열심히 살뿐이지.”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나무들이 즐거운 일이 곧 숲에게도 즐거운 일이니까, 그에 대한 보답 정도는 숲이 마련할 수도 있지 않니?” 

“보답이라…. 글쎄. 그냥 숲이 즐거운 게 보답이 아닐까? 숲은 나무들이 숲에게 부여해 준 의미 이상을 만들려 하진 않아. 숲은 나무들로 이루어졌으니, 숲의 존재 이유도 나무들이 만드는 그 정도면 족해. 숲이 누구를 위한다고 나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질문에 사람의 숲이 좋은 반면교사가 되지 않을까?”

“사람의 숲이라면 내가 사는 사회를 말하는 건가?”


“나무 그루 그루가 모여 숲을 이루듯 사람 한 명 한 명이 모여 있으니 그것을 사회라 부르든, 아님 사람의 숲이라고 불러도 기분이 상하지 않겠지? 그럼 보자구. 둘 다 숲인데, 사람의 숲은 지금 사람들을 진정으로 위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무의 숲이 보기엔 위한다는 게 대부분 욕심으로만 보이는데.”

“그렇지만은 않아. 애초 사람의 숲도 욕심은 없었어. 단지 나무들이 잘 자라야 숲이 무성하듯 사람들이 잘 자라야 사회가 융성해진다는 생각에 몇 가지 제도를 만들었을 뿐이야.”


“그렇지. 그것이 나무의 숲과 사람의 숲이 가진 가장 큰 차이지. 언제부터인지 사람의 숲은 사람을 살린다면서 숲 스스로 무엇인가 부산스러웠어. 제도와 법을 만들고. 그것보다 더 심한 건 어떤 규범이라 불리는 것들인데. 마치 나무들에게, 좋은 숲을 만들기 위해 소나무 옆에는 가시나무가 서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그래서 어떻게 됐지? 사람의 숲은 그 뜻대로 사람을 이끌려다보니 약한 사람을 쓰러뜨리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잖아.
혹은 사람의 숲이 만든 제도에 맞추려고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자신의 시간과 얘기를 잃어버리고 살지. 네가 처음 했던 말 생각나? 나무들이 숲 얘기만 할 거랬던 말. 실은 그 말은 사람의 숲에 어울리지. 사람의 숲에 사는 사람들은 숲 얘기만 하잖아. 사람의 숲에서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 그러니까 삶이 고달파지고 세상이 재미없는 거야.”  


“네가 지적한 게 맞는다면 나무의 숲은 그렇지 않은데 사람의 숲은 왜 이렇게 되었지. 사람의 숲도 초심은 사람을 위한 것이었는데.”

“누구를 위한다는 말이 잘못된 것 아닐까? 누가 누구를 어떻게 위해줄 수 있을까? 나무의 숲에는 ‘위하는 것’이 없어. 다만 스스로가 제 삶을 즐길 뿐이야. 그래도 나무의 숲은 얼마든지 푸르잖아. 본디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생명들이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거든. 나무 한 그루가 저 혼자서도 스스로 싹을 틔워 푸른 하늘로 꿈을 뻗어 가듯이.”


“대신 사람의 숲에는 사람의 숲을 바꾸려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 나는 그들이 희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사람의 숲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너는 ‘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사람의 숲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도 잘못된 건가?”  

“사람들 중에 사람의 숲을 정화하려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알지. 그렇지만, 그 사람들 역시 그 일이 남을 위하기 전에 자신에게 즐거운 일이어야 한다는 거야. 자신이 즐겁지 않고 무슨 사명감처럼 일하게 되면 결국은 쓰러져. 아니면 위한다는 마음이 변질되거나. 그러니까 자신이 ‘위한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 일에는 열정을 쏟아 붓지만 다른 일에서는 전혀 사람을, 숲을 위한 행동이라고 볼 수 없는 일을 하는 이들도 있잖아. 혹은 그러면서 목에 힘이 들어가게 되잖아. 다시 말하지만, 자신이 즐겁지 않으면서 남을 위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해. 나무들은 누구를 위해 양지를 양보하고 비탈로 물러서거나 하지는 않아. 때론 제자리에 머물러 주는 것도 힘이 될 때가 있어.” 


“즐겁다? 이 말은 뭐지? 때론 눈물겨운 삶들도 있는데.”

“내가 말하는 즐거움이란 게 꼭 희희낙락을 말하는 것은 아냐. 사람의 숲에 떠도는 말로 하자면 진정성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네. 마음에서 눈물이 흐르는 일도 즐거운 일일 수 있잖아. 그 모든 것까지가 내기 말하는 즐거움이야.”

“… ….”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말을 잊으면 이 숲엔 바람이 불지 않을 거야. 나무들이 싹을 틔우지 않으면 이 숲에 봄이 오지 않고. 사람들이 희망이 없는데 어떻게 사람의 숲에 희망이 오겠어? 잘 생각해 봐! 너뿐만 아니라 사람들 모두 나무가 되어야 좋지 않을까. 숲을 노래하는 나무가 아니라 나무를 노래하는 나무 말야.”

“네 긴 팔을 뻗어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사람의 숲을 나무의 숲처럼 만들어 주면 안될까?”

“미안하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없어. 사람의 숲은 사람이 만들었으니 사람이 바꿔야지. 네가 먼저 즐거운 삶을 살아봐. 그럼 사람의 숲도 점차 나아질 거야.”



2

숲이 내게 말한다.

“나무로 살지 않을래?”(2001.3.)

'서른의 생태계 > 서른의 생태계32+33' 카테고리의 다른 글

32와 12분의 4  (0) 2009.11.17
병문안의 목적  (0) 2009.11.17
봄, 내 맘의 생태계  (0) 2009.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