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과의 이별
책상 위 책꽂이에 꽂혀 있던 시디 20여장을 챙겼다. 언젠가 필요해 한두 권씩 가져왔던 책들도 꺼내 박스에 넣었다. 작은이야기 과월호도 한 부씩 모았다. 내 밥줄을 이어주었던 이들의 이름이 적힌 명함 대여섯 덩이를 모아 박스에 넣었다. 미쳐 되돌려 주지 못한 필자들 사진도 챙겼다.
12월 9일 일요일. 점심 무렵 국가인권위에 출근해 10일 있을 인권선언기념일 행사 문안을 작성하고는 오후 7시 무렵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곧장 자전거를 타고 <작은이야기> 사무실로 가 짐을 정리했다.
책상 밑 구석에 있던 ‘월간 말’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인 두 개의 박스. 19개월 전인 지난해 4월 30일, <말>에서 쓰던 서류들을 버리지 않고 가져온 박스였다. 그곳엔 <말>에서 취재한 자료가 빼곡히 담겼다. 이후에 참고할 자료라기보다는 혹시 기사에 시비가 들어올 경우를 대비해 버리지 않은, 방어용 서류들이었다. 그 박스를 풀어, 버려도 될 것은 버리고 혹시 누가 보면 안될 내용들은 찢어서 폐기했다. 한 3년여 동안 기꺼이 감수해야 할 내 마음의 긴장을 그렇게 풀어 헤졌다. 그래도 여전히 버리지 못한 게 있었으니, 1년 반 가량을 끌어온 내 재판 관련 기사 자료였다.
박스 세 개에 짐을 챙겨서는 택시를 타고 집에다 갖다 두었다. 나머지 짐을 정리하려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밤 10시가 넘어 짐 정리가 모두 끝났다. 비로소 이제 정말 이곳을 떠나나보다 싶었다. 가슴 한 곳에 약간은 쓸쓸한 그 무엇이 걸렸다. 무엇 때문일까!
잡지에 대한 미련은 아니었다. <작은이야기>가 잘 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 잡지를 만들기에는 토양이 맞지 않은 출판사였다. 잡지와 단행본이 다르다는 것을 좀 더 신중히 판단했어야 했다. 잡지 발행인의 의지와 지향이 나와 명확히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 미련이란 있을 수 없었다. - 내가 가끔 싸늘하게 바뀌는 대목이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면 좋겠지만, 모든 경우를 불문하고 행복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만큼의 성과를 받으면 된다. 남을 한 대 때린 놈은 언젠가 한 대 얻어맞는 게 옳다. - 이 슬픈 휴간은 그런 결과다.
짐 정리하면서, 함께 생활했던 출판사 사람들이 마음에 걸렸다. 단행본을 만들던 사람들. 뭔가 뜻과 지향을 나눌 수 있을 관계였다. 물건을 하나둘 치워 책상 위는 말끔해졌지만, 생각들로 머릿속은 조금 복잡해졌다.
컴퓨터를 켰다. 이 기분을 정리하고 싶었다. 내일 아침 출근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글이라도 한 줄 써 놓을까! 그때부터 이런 저런 얘기를 적었다. 먼저, 그동안 독자들에게 보낼 편지를 정리했던 정기구독 담당자에게 건넬 말을 적었다. 다음엔 <작은이야기> 마무리 일들을 위해 총무과장이 마지막까지 책임져야 할 일 - ‘당신의 희망입니다’ 캠페인 정리, 필자들 원고료 입금 등을 당부했다. 마지막으로 전체 직원들에게 보내는 글을 적었다.
11시 30분. 글쓰기는 끝났다. 이제 프린트하고 복사해서 직원들의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끝이다. 그런데 내 컴퓨터에서 프린트가 되지 않았다. 며칠 전 먼저 나간 기자들 컴퓨터를 다른 부서에서 쓰겠다고 했는데 그때 프린트 연결을 잘못한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디스켓에 복사하고는 프린터가 연결된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디스켓 파일이 열리지 않았다. 10여분 동안 내 컴퓨터를 오고가며 해 봐도 그 파일만 열리지 않았다. ‘아무 말 하지 말고 떠나라’는 의미였을까! 할 수 없이 포기했다.
두 장 정도 쓴 그 글에 무슨 얘기를 담았는지 지금은 기억할 수 없다. 회사에 대한 약간의 씁쓸한 감회도 적었던 것 같고, 회사에서 내가 못다 이룬 일들도 적었을 것이다. <작은이야기> 휴간에 한 역할을 했을 편집장의 원칙주의에도 한 마디 했다. 내가 편집장이었어도 그 원칙은 유지했을 거라고. 그래서 떠도는 편집장 책임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또한 출판사에서 만난 인연들에 대해 감사하다고.
그 글에 쓴 감사는 위선은 아니다. 그럼에도 정말 이곳 출판사 사람들과 친하긴 한 건가 싶은 반문이 들었다. 답은 명확했다. 친한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잡지팀 안에서도 그리 속 시원히 말 못한 사연들이 많았는데, 하물며 잡지팀 밖의 사람들과 서로 얘기를 나누고 할 기회는 더욱 없었다. 그럼에도 짐 정리하면서, 그런 인연들에 대해 감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들에 대한 내 안의 기대와 꿈 때문이었다.
최근엔 상조회를 만들고 싶었다. 원초적 태생의 문제 - 내가 <말>에서 일했다는 상표 혹은 자기검열 - 때문에 나서지 못하는 내 처지를 이해하고 본인이 앞장서서 상조회를 만들겠다던 직원도 있었다. 그 직원과는 11월 말쯤 상조회를 만들기 위해 전체 직원모임을 갖자고 얘기까지 해 놓은 상태였다. 그렇게 모임이 꾸려지면, 나는 한편으로 회사 전체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30대 초반이 대부분인 직원들과 40대 초반의 사장이 있는 회사에서 토론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비극이다.’
그 무렵 스스로 되뇌던 문구다.
서서히, 아주 더디게 활성화되고 있던 회사 내 인터넷게시판에도 글을 한두 편씩 올리고 싶었다. 좀더 욕심을 내 사장과도 대화 하려 했다.
그런 몇 가지 기대와 꿈이 절실하진 않았지만, ‘필요성’은 충분했다. 운동이란 게 구호로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 인간의 행복을 앗아가는 게 국가폭력이나 대기업의 자본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 정작 회사 안에서 불거지는 사소한 일들 때문에도 사람들은 충분히 희망을 잃고 산다는 것. 그런 것을 극복하고 싶었다.
세상을 바꾸는 일을 내 일터에서부터 이뤄가고 싶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욕심에서 보면, 그것보다 명확한 구호와 이슈는 없었다. 여전히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를 후원하고, 사회운동과의 나눔이란 생각으로 민가협 회지에 글을 쓰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회 기득권들과의 싸움은 계속해야 하지만. 지금의 나는 20여 명의 직원들과 소통이 중요했다. 자기 공간에서의 희망을 가꾸지 못하고서, 사회와 사람의 희망을 말하긴 어려웠다. 그렇다고 ‘자기공간부터 충실해야 한다’고 우선 순위를 매길 생각은 없었다.
끝내 직원들에게 말 한마디 전달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밤 12시가 다 되어 회사에서 나왔다. 지난 가을 회사 사람들과 떠났던 1박2일의 야유회가 소중한 추억으로 가슴에 밀려왔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회사 사람들을 위해 한 일은 그것뿐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어떻게 느꼈는지는 몰라도, 나는 회사 안에서 내가 꿀 수 있는 꿈의 한 가지로 최선을 다했으니까.
2. 일과의 이별
<작은이야기>의 마지막 생명은 길었다.
<작은이야기>를 그만 둔 다음 날 저녁, 국가인권위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당시엔 시도 때도 없이 기자들의 전화가 걸려오던 때라 목소리를 낮추어 전화를 받았다. 어떤 여성이었다.
“난 데요?”
“……”
나? 아마 지문조회 할 때 컴퓨터가 그렇게 움직이지 않을까 싶다. 컴퓨터는 그동안 저장된 데이터를 순식간에 들추며 맞는 지문을 찾을 것이다. 그처럼 내 머릿속도 움직였다. 이 목소리에 맞는 여성이 누가 있을까? 검색결과는 실패였다.
“여보세요? 노정환씨?”
더욱이 전화 음질도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누구냐고 물으면 상대방이 실망할까봐 어찌 할까 아주 짧게 망설였다.
“나… 사장인데요.”
사장? 미국에 출장 간 <작은이야기> 사장? 그럼 이건 국제전화? 사장은 내가 회의중이었다는 얘기를 듣고 약간 당황한 모양이었다. 하긴 어제 직장을 그만 둔 놈이 오늘 회의를 하고 있으니.
그로부터 30여분, 다른 사람들은 회의를 끝내고 저녁식사를 하러 가는데, 나는 핸드폰을 든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식당 앞 복도에 서서 사장과 통화했다. 사장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작은이야기>를 휴간하지 않고 다른 출판사에 넘기려하는데, 나더러 편집장으로 가라는 거였다.
인수…. 그랬다. 12월 5일. 이전에 <말> 편집장이었던, 지금은 한 월간 교양지를 운영하는 한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작은이야기> 휴간 소식을 들었는데, 아깝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휴간하게 된 내력과 떠돌던 인수설 등을 물어왔다. 나는 아는 대로 이야기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 다음날 그 선배는 다시 전화를 걸어, <작은이야기>를 인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무렵 인수를 거론하기엔 상황이 다소 급박했다. 11월 21일 최종적으로 <작은이야기> 휴간을 결정하고 - 사장은 폐간을 얘기했으나 막판에 나는 폐간보다는 휴간으로 하는게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 난 후 곧바로 휴간 작업을 진행했다. 가장 큰 일은 정기구독자들에게 휴간 소식을 전하는 거였다. 그 작업은 비교적 빨리 진행됐다. 11월 말,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을 작성하고, 인쇄한 후 정기구독 담당 직원이 선물과 함께 우편발송 작업을 했다. 담당 직원은 아르바이트를 써서 12월 7일 무렵에 발송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이 편지가 정기구독자들에게 전달된 후, 인수가 이뤄지면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정기구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12월 12일에는 발송해야 했다. 그 무렵쯤 보내야 잡지를 기다리는 독자들이 제때 편지를 받아 볼 수 있다. 그러니 인수문제는 12일까지는 끝내야 했다.
더욱이 <작은이야기> 사장이 미국에 나가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기간 안에 협상을 하기에 어려운 점이 많았다. 결국 국제전화를 통해 협상이 진행되었다. 몇 차례 계약서 초안이 오고갔다. <작은이야기>는 잡지를 아끼는 마음에 편집권과 관련해 일정 지분을 달라고 요구했고, 인수하려던 선배는 난색을 표했다. 이 과정에서 사장이 한 발 물러서면서 들고 나온 대안이 나를 편집장으로 세운다는 거였다. <작은이야기>에 대한 애정 끝에 택한 궁여지책이었다.
그러나 사장의 전화를 받은 나로서는 무엇을 결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 하루하루 밀려드는 국가인권위 일은 벅찼다. 더욱이 애매한 상황에서 편집장을 맡는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 지 회의적이었다. 때문에 사장에게는 인수가 된다면 할 수 있는 만큼 도움드리겠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 끊었다.
3. 글과의 이별
지난해 5월 1일. <말>에서 <작은이야기>로 옮기면서 감성적인 글쓰기를 생각했다. 글마다 주제를 담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 주제를 어떤 방식의 글로 쓸 것인가를 고민하는 가운데서 감성적인 글쓰기는 내 주요 관심사였다. 그 무렵 <작은이야기> 근무 제안이 들어왔고, 그런 훈련을 <작은이야기>에서 하기로 작정하고 들어갔다. 궁극적으로는 ‘내가 만들고 싶은 잡지’를 찾아가는 여정의 한 단계였다. 누구 말처럼 월급 받으며 일 배우는 셈이었다. 그리고 19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작은이야기>에서 처음 작정했던 일을 얼마나 이루었을까!
무엇보다 편집장들의 잇따른 교체가 안타까웠다. 잡지 입장에서도 아쉬운 일이었지만, 내가 배우는 과정에서도 아쉬움이 남았다. 한 사람의 스타일을 좀 더 진득하게 배웠더라면 잡지 편집의 ‘깊이’를 맛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잦은 편집장의 교체가 준 득도 없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가 ‘기자’로만 머물지 않고, 잡지 전체를 보려는 ‘편집자’로서의 눈을 키워갈 수 있었다. 처음 개편 때, 그리고 편집장이 바뀐 두 번의 시기에 전체 그림 속에서 새 아이템을 생각했다. 그때 편집자의 시각을 조금이나마 흉내 냈다.
세 명의 편집장과 일하면서 ‘편집장’이라는 자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자리인지 조금은 생각하게 됐다. 발행인과의 몇 가지 큰 일들에 대응하는 편집장들의 행동과 태도 역시 내게는 훌륭한 교사들이었다.
아울러 <작은이야기>는 변화의 폭이 큰 매체가 아니어서, 전체 그림을 그려보는 데는 좋은 ‘놀잇감’이었다. 작은 칼럼들과 큰 칼럼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등은 <말>에서 맛 볼 수 없는 또 다른 재미였다. 그 과정에서 현장 활동을 하면서 가졌던 잡지 개념을 아예 몽땅 뭉개버리기도 했다. 내가 주장하는 무엇무엇, 즉 잡지란 최소한 이래야 한다는 것들에 대해 모두 ‘아니다’로 단절해 두고 고민했다.
<작은이야기> 생활에서 얻은 두 번째 득은 취재기자가 아닌 편집기자로서의 매력을 느낄 기회를 가진 점이다. 주로 사무실에서 내근하면서 칼럼을 기획하고 청탁하는 일에 나름대로 입맛이 돋곤 했다.
기성 작가 및 사회 유명인들에게 하는 청탁은 일 자체가 주는 맛은 덜했다 그러나 그들과 나누는 대화는 간간이 삶에 시선한 자극이 되었다. 화가 황주리, 시인 박남준, 구호활동가 한비야, 소설가 김별아, 소설가 전성태, 목사 임의진, 화가 이동진, 문화평론가 김지룡, 기자 이영완님까지. 주로 마감 때만 전화를 걸어 원고를 독촉하고, 마감이 늦으면 애가 타서 안절부절못하기는 했지만, 그런 과정 - 주고 받은 이메일과 전화 통화 하면서 느낀 친밀감은 단순히 유명작가들에 대한 동경과는 달랐다. 조금이나마 그런 사람들의 세상을 알게 된 게 잡지 구상을 하는 데, 그리고 삶의 한 여정으로 따져보아도 큰 소득이었다.
편집기자로서 느낀 또 다른 맛은 일반 필자들을 상대로 한 기획청탁이었다. 기획청탁이란 용어는 내가 쓴 표현인데, 이를테면 이런 거였다. 올 8월호에 김경환 선배 형수의 글이 실렸다. 당시, 형수의 이런 저런 얘기를 듣고는 그 중에서 이런 부분에 대해 글을 써보라고 부탁했다. 한번은 술자리에서 만난 어떤 이의 사연을 듣고는 다음날 전화를 걸어 그 날 술자리에서 말했던 부분을 한번 써보면 어떻겠냐고 해서 원고를 받았다.
즉 정해진 칼럼에 독자들이 보내온 원고 중에서 나은 것을 싣기보다는, 어떤 이들의 사연을 들은 후에 그 사연 중에서 어느 부분을 중심으로 써 달라고 해서 원고를 실었다. 이처럼 앉아서 기다리는 원고보다 사연을 알고 청탁하는 원고가 질적으로 훨씬 좋았다. 그래서 편집기자라고 하더라도 가능하면 현장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잡지의 질을 높이는 한 방법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취재기자로서 글쓰기 면에서도 몇 가지 실험을 해 보았다. 각 매체들마다 지향하는 글의 스타일이라는 게 있을 터인데, 그 스타일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가 문제였다. 똑같은 사건이라도 작은이야기에서 기사를 쓰는 방식과 시사지에서 글을 쓰는 방식은 달라야 한다. 그러나 그처럼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았다. 글을 쓰다보면 나도 모르게 스타일이 굳어 버린다. 잡지가 가진 색에 갇혀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지 못한다. 더욱이 <말>에서 쓴 기사 스타일은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고민은 필자가 어느 정도 글에 개입해 들어가는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대개 시사지의 기사는 기자의 감정적인 부분이 최대한 자제된 채 쓴다면, <작은이야기>는 기자의 감성을 허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기사에서 나를 내 보이기를 몇 차례 해 보려 했지만 소재와 맞지 않은 때가 많았다. 그런 시도를 해본 게 올 8월에 쓴 대청호 젊은 어부를 취재한 기사였다. 이어서 쓴 글은 12월호에 쓴 ‘14층에서 떨어진 아이’였다. 이 기사를 쓰면서는 감성적인 글쓰기, 주관이 강한 글쓰기일수록 다방면에 걸쳐 공부해야 하고 특히 인생관과 세계관이 나름대로 명확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14층 베란다에서 아이가 떨어졌는데, 큰 부상 없이 무사했다’는 특이하지만 지극히 단순한 이 소재를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고 풀어갈 것인지는 간단치 않았다.
글쓰기 실험을 연장할 수 있는 기회는 오일장 연재취재였다. 오일장 취재 기사는 80%의 객관적 사실에 20%의 주관적 감상으로 구성했다. 내년부터서는 40~50% 정도까지 필자인 ‘나’를 넣으려 했다. 6개월 남짓 연재한 상태이니까 분위기를 바꾸는 효과를 얻고 좀더 <작은이야기> 어울리는 글 스타일을 만들어본다는 나름의 실험 계획이었다.
결과적으로 감성적인 글쓰기, 기사의 새로운 작성 방식은 작은이야기 생활 내내 실험이었고 과제였다. 일반 언론사의 기자들이라면 글을 잘 쓰는 일보다 특종거리에 관심을 두겠지만, 나는 오히려 이런 실험과 과제가 더욱 긴요했다. 글은 사람(필자)과 사람(독자)을 연결하는 ‘매개’의 역할이 무척 중요하다는 생각과, 그 생각을 위해서는 말하려는 자가 들으려는 자를 먼저 배려해야 한다는 내 독특한 믿음 때문이었다.
이런 내게…
<작은이야기> 사장이 궁여지책이었을지라도 편집장 제안을 했을 때, 내 마음은 어땠을까? 나도 참 궁금하다. (2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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