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부터 아버지가 성당에 다니신다. 종교적 귀의는 아니다. 심심함을 달래기 위한 방도다. 아버지가 상계동에 뿌리를 내린 지 20여년이 흘렀지만, 시골마냥 친구 분들이 그리 많지 않다. 처음에 성당에 나갔을 때는 어색했던 모양이었는지, 한 번 건너 한 번씩은 빠지곤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두꺼운 성경책이 방안에 놓여 있었고, 어느 날인가는 설교테이프를 듣고 계셨다. 최근엔 베드로라는 세례명도 받은 모양이었다.
지난 주말에 들른 아버지의 방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한 개 걸렸다. 성당에서 아버지를 돌보아 주는 분이 선물로 준 거라고 했다. 아버지는 몇 만원 하는 그 십자가를 받아들고는 가격에 적지 않게 놀란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동안 잘 해주던 그 분이 이사가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그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절친한 친구와 헤어지는 느낌일까?
아버지가 종교를 처음 접했을 때는 상계동에 이사온 지 이삼년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때 쌀가게 하는 이웃집 목사를 알게 되셨다. 그 목사의 추천으로 주말이면 한 교회에 나가시곤 하셨다. 그러나 찬송가를 부르는 등의 종교적 의식에 익숙하지 못한 아버지는 곧 흥미를 잃었다. 그리고 20여년이 흘러 이번엔 천주교에 관심을 갖게 되셨다.
아버지가 성당 이야기를 얼핏 꺼냈을 때 나는 넌지시 한번 다녀보라고 했다. 환갑을 넘기고 새로운 직장을 얻기는 어려운 현실에서, 집에만 머무는 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친구분들만 만나면 아무래도 술 한 잔씩 나누려니 생각하니 그래도 성당이든 교회든 종교적인 관심을 갖는 게 좋을 듯 싶었다.
아버지에게 성당을 권한 것은 실은 자식으로서의 부모에 대한 책임 회피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외로움에 대한 외면이다.
아버지는 요즘에도 틈틈이 어머니랑 함께 살았으면 싶은 마음을 내비치신다. 틈만 나면 어머니를 화나게 했던 ‘사건’에 대해 내게 넌지시 해명을 하신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전히 냉담하시다. 이미 마음이 멀리 떠나버렸다. 아마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화해가 이뤄진다면, 아버지에게는 그보다 더 한 노년의 선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풀리지 않는 상태의 어머니에겐 부담만 될 뿐이다. 굳이 나누자면, 어머니가 더 큰 피해자인 상황에서 아버지의 뜻만으로는 화해는 이뤄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 현실에서… 아버지는 외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나들은 이미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라 조카들의 엄마로 산 지 오래 되었다. 이런저런 상황에서 아버지에 대한 내 역할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일과 온전한 내 삶만을 중심에 두고는 그 외로움을 외면하고 있다. 인식하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것. 나 같은 먹물들의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은 요즘 들어 가끔씩 아버지가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찾아가겠다고 전화를 걸고 상계역에 도착해 확인 전화를 해보면 아버지는 댁에 계신다.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 아버지가 사랑스럽다. 그리고는 많지 않은 돈이지만 한 달에 얼마라도 아버지에게 돈을 줄 수 있을 만큼 자란 내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가끔씩 전화를 걸면 반가움을 숨기지 않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사춘기 때 연민조차도 생각지 못할 만큼 싫어했던 아버지를 이제는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기원한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일이 혈육의 사랑이 아니길. 내가 누이들보다 자주 아버지를 찾아뵙는 게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누이들보다 생계를 덜 걱정하기 때문이라고. 서른이 넘어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날, 내 안에서는 가부장제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가부장제를 넘는 또 다른 모습을 갖고 있길 기원한다.
아버지는 인권의 기준으로 보면 독거노인이다. 그 많은 독거노인 중에 나는 아버지를 우선적으로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를 생각할 때 내 가슴속에 떠오르는 사랑의 빛깔이길 바란다. 늦지 않기 전에 나는 아버지에게 또 하나의 ‘종교’로 남고 싶다. (2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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