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이유명호님을 인터뷰 한 일이 있다. 세 살 손자가 할머니보다 우월하다고 인정하는 호주제의 폐지운동을 벌이는 이유님. 그에게 ‘내 인생을 바꿔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이유님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꼽았다.
이유님이 중고생 시절, 그의 아버지는 이유님과 함께 이름부터 야한 ‘내시’ 영화를 보러 갔다. 미성년자인 이유님이 입장불가 판정을 받은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부모랑 함께 보러 왔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극장주인과 맞섰다. 그날 이들 부녀는 되돌아왔지만, 그 목적은 훗날 단속이 덜한 동네극장에서 이뤄졌다.
이유님의 아버지는 우리 일상에 스며든 획일적인 권위와 질서에 딴지를 건 어른이었다. 학교에 가야 할 평일에 딸의 손을 붙잡고 광릉으로 놀러 간 일, 교장선생이 훌륭하다는 이유만으로 중학교를 하향 지원한 일 등은 예사 아버지로서는 실천하기 어렵다. 또한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반말을 쓰라 한 이도 아버지였다. 이유님이 결혼할 때는 ‘참고 살아라’는 말 대신 “남편이 한 대라도 때리면 당장 돌아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개인의 자유를 확장하기 위한 사회와의 싸움에 관심이 많다. 그 관심은 이제 제도의 모순뿐만 아니라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적 습관으로 확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연애라는 영역도 만나게 되었다. 이를테면 연애에 대한 살핌과 관찰의 대화는 이런 식이다.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결혼한다는 말은 뭔가 위태로워 보여. 사랑의 자가발전력은 대개 3년 정도면 끝나는 것 아닌가? 그 후엔 그 사랑을 지속할 힘으로 무엇이 있지? 아이를 갖는 것? 아니면 ’유효기간 3년‘이라는 말을 부정하고 ’평생보증용‘ 사랑을 찾는 데만 전념해야 하나?”
“많은 이들은 ’내 사랑만은 영원한 사랑‘이라고 믿겠지만, 사랑의 영원성이야말로 특수한 경우 아닐까? 사람에 대한 끌림이란 게 때와 장소와 시기를 초월하거든. 먼저 만났다는 이유로 다음에 오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할 근거는 뭐지? 그 부정 역시 사회적 습관으로부터 강요된 선택 아닐까?”
“연애 감정만으로 30~40년 동안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까? 그것이 어렵다면 연애 감정을 대신할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난 그것을 자기실현이라고 생각해. 연애 역시 각자의 자기실현을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는 거지.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 사랑을 나눈다. 둘은 그 사랑이 각자의 자기실현에 에너지를 줄 수 있는 방안을 찾는다. 그 방안이란 결혼일 수도 있고, 동거일 수도 있고, 그도 아닌 또 다른 어떤 형태일 수도 있다.’ 결국 연애의 대상으로 ‘자기실현에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들 중 강한 끌림이 이는 사람’이 제격이겠지. 물론 그와 느낌이 맞고 마음이 어울리고 몸이 조화를 이뤄야겠지만.”
개인의 자유 확장을 위한 사회와의 싸움을 얘기하는데 연애를 끄집어 낸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내가 최근 또 다른 이별을 겪고서 다시 연애에 대한 살핌과 관찰을 하게 된 것이 우선 한몫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연애야말로 우리 일상에서 획일적인 권위와 질서가 아무런 여과 없이 스며드는 영역 중 가장 달콤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인한 가슴앓이, 주류 이성애의 비주류 동성애에 대한 차별, 가정에서의 남녀 역할 불평등,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여성과 남성… 등 적지 않은 일상의 일그러진 형상들이 연애로부터 비롯되거나 파생된다. 그럼에도 그 달콤함으로 인해 ‘나만은 다를 거야’하는 과신을 믿는 나머지 누구든 쉽게 유혹된다.
연애를 언급한 또 다른 이유는 연애를 포함한 그 어떤 자유든 결국 개인의 자기실현 욕구로 맞닿아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무엇인가를 하며 살고 싶은 욕망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정치적 욕구든, 문화적 욕구든, 소박하든, 거창하든.
자기실현의 욕구는 정직하다. 내 몸이 무엇을 원하고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하는가에 따라 나타난다. 그것은 사회적 가치의 잣대를 들이밀기 이전부터 발현된다. 그런 이유로 사회적 편견과 습관을 만나면 자주 부딪힌다. 그 벽에 좌절한 이들은 자기실현의 욕구 대신에 사회가 규정한 욕구를 찾는다. 이때부터 사회 주류의 욕구가 - 대개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의 욕구가 - 자기실현의 욕구를 대신하려 든다. 결국 하고 싶은 일은 제약받고 좌절되고 끝내는 소멸되거나, 미진한 힘으로 남아 가끔씩 버둥거린다.
이쯤에서 그 자기실현의 욕구를 제약하고 억압하는 사회의 제도와 습관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자기실현의 욕구를 지키는 일은 곧 세상과의 부득이한 싸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사소한’ 자기실현의 욕구로 귀걸이를 찾는 남성들에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사회적 금기였다.
개인의 다양성은 곧 각 개인이 자기실현의 욕구를 표현하는 수단을 선택할 자유를 의미함에도, 그런 차이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는 여전히 낯설다. 오히려 차별적 억압을 조장하는 사회적 습관은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주류는 그런 이들에게 사회적 혼란 유발을 이유로 꾸지람한다. 때론 주류의 힘으로 억압하고 탄압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로 인해 사회 주류와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하는 개인들은 고통 받고 불편해 한다.
그 고통과 불편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다면 자기실현의 희망 또한 멀지 않는 길에서 만날 수 있다.
열 명의 사람이 모인 사회엔 열 가지 꿈이 자라고, 백 명의 사람이 모인 사회엔 백 가지 희망이 자라는 세상. 나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그리고 내 이 꿈에, 아직은 주류에 덜 익숙하고 자기실현의 열망이 강렬한 20대의 동지들이 함께 하길 바란다. 그런 개인들과의 연대는 무엇으로든 할 수 있다. 간간이 찾는 홍대 앞 클럽에서는 춤으로 가능하고, 사이버상의 온라인 시위에서도 가능하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이 순간에도, 그대는 그대의 꿈을 향해 달려가길. 그리고 부단히 싸워가길 바랄 뿐이다. 그 꿈길에서 만나는 소란은 혼란이 아니라 소통이다. 세상과 나, 혹은 나와 나와의. (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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