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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riting Story

기대가 아닌, 믿음 혹은 사기

<My Writing Story> - 글, 사람과 놀다



<오마이뉴스> 기획을 준비하는 줌마네 3기 아줌마들께 



줌마네 3기 보강 수업 계획을 짠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또다시 발목이 잡혔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사쓰기를 해 보자고 제안한 것은 분명 과도한 욕심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일 벌이기를 좋아한 탓에 해야 할 일이 충분히 쌓여

있는 상태였으니까요. 더욱이 시리즈로 진행해 보자는 것은 사서 고생한다는 조롱을 들어도 달리 변명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버젓이 알면서도 내치지 못한 것은 지나친 결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3~4개월 글쓰기 공부를 한 아줌마들이 이름 석자를 내걸고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현실에서, 선생이란 이름이 갖는 짐은 예상보다 무거웠습니다. 잡지에 어울리게 글을 써야 할 텐데 싶은 마음부터, 검토해 달라고 올려놓은 초교에서 간간이 보이는 빈틈까지가 모두 부담이었습니다.    

결국 그 짐을 조금이라도 미리 벗어보려고 시작한 일인데, 끝내 제 꾀에 제가 빠진 꼴이 되었습니다. 주말을 전후로 몇몇 아줌마들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에 대해 충실히 답변해 주지 못하는 나를 보며 미욱한 인간 하나를 만났다 싶었습니다.

 

1. 

줌마네 첫 강의에서 몇몇 분들은 “나 자신을 위해 투자하고 싶다”거나 “내 시간을 갖고 싶다”며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게 마련인 자기실현의 욕구를 비쳤습니다. 또다른 분들은 자유기고가를 선택한 이유로 돈벌기를 꼽았습니다. 평상시 관심 있었던 글로써 경제적 활동을 벌일 수 있다는 점에 좀더 호감이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4개월간의 강의가 끝난 지금, 어떤 분들은 신문에서 본 줌마네 소개 기사가 과장되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부지런히 수강했음에도 돈을 벌 수 있는 여지는 찾을 수 없고, 이전에 갖고 있는 글쓰기에 대한 자부심마저 사그라들었을 테니까요. 결국 무엇을 배웠나 싶은 회의가 들 법도 합니다. 

소심한 분들은 그런 기사들의 주인공들과 달리 좀처럼 나은 구석을 발견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자괴감에 빠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유기고를 하며 돈 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매체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은 진실이지만, 애초에 호락호락 잡히는 진실은 없습니다. 그 진실을 잡는다고 해도 웬만한 수입을 갖추기까지는 지난합니다. 물론 이미 졸업한 줌마네 자유기고가들 중에는 그 진실에 다가선 분들이 있습니다.

몇 개의 매체에 안착해 나름의 입지를 굳히고 있습니다. 이름 있는 잡지에서 종종 그분들의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의 ‘성공’을 들어 희망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서울대에 입학했던 한 명의 사례를 들어 수백 명의 영혼을 메마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 글은 지금쯤 그만치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의기소침해 있는 분들과 나누려는 대화입니다. 나름대로 글을 쓴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취재글을 배우고 나서 오히려 뒷걸음질만 한다고 느끼는 아줌마들과, 경제적 가치를 가늠해 투자했으나 그 본전이라도 찾을 방도가 보이지 않은 답답함에 하루를 보내고 있는 분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물론 이 글은 로또같은 대박을 찾는 경제적 산술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며, 한달음에 깨우질 수 있는 쌈박한 글쓰기 비법을 얘기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글이 가진 또다른 지위, 그것에 대한 저의 뒤늦은 성찰이며 독백인 것입니다. 그래서 봉투에는 아줌마라고 쓰였지만, 내용은 자신의 넋두리를 읊은 오만한 편지이기도 합니다.   

  

2.  

이른바 기자란 이름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한 켠으로 드는 생각은 글의 쓸모였습니다. 

‘내가 쓰는 기사가 어떤 가치가 있으며 누구에게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

가끔씩 그런 질문이 떠오를 때는 분명 제 일에 회의하던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이미 내가 쓴 기사가 우리 사회의 앞길을 밝게 하는 데 보탬이 된다고 느꼈다면 동료 기자들과 술이라도 기울였을 테니까요. 

활자매체는 모든 이들에게 친숙한 매체는 아닙니다. 그것은 일정 정도 지식을 가진 이들에게 유용합니다. 저의 초등학교 동창들은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들이 많아, 잡지보다는 TV가 좀더 편안하고 익숙합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저의 관심은 늘 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 화려한 곳보다는 허름한 곳에 먼저 눈길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끌림이라기보다는 애초에 살아온 태생이 그러하였으니 원초적 관심인 듯합니다. 그리곤 그런 이들을 만나 취재하고 기사를 쓰고는 낙심에 빠지곤 했습니다. 내가 쓴 기사를 그들이 읽어주지 않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이런 고민을 안고 몇 해를 보낸 끝에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내 기사가 ‘매개(媒介)’가 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갈수록 넓어지는 우리 사회 계층간의 간격을 기사로 메워보자는 뜻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가진 이들과 갖지 못한 이들의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이 격차는 단순히 경제적 격차로 끝나지 않습니다. 경제적 격차는 문화적 격차이며, 시회 참여의 격차입니다. 아이들에겐 교육의 차이로 나타나며, 부모들에겐 효의 질적 차이로 나타납니다.

그 현실에서 기사는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입이 되고자 했습니다. 비록 낮은 세상의 이야기를 그곳의 사람들이 읽지는 못하지만, 누군가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는 삶을 공감하고 생활을 이해한다면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고통과 삶의 숨결을 느끼는 체험은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한 또 다른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좀더 기사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었습니다. 그 무렵에서 기사도 쓸모에 있어서는 글의 한 종류와 다를 바 없다고 느꼈습니다. 글을 단순히 매개로 둘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진 힘을 누구든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런 가능성은 이미 오마이뉴스가 충분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시민은 기자’라는 모토의 태생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글이 매체와 만났을 때 갖게 되는 힘이 많은 이들에게 나눠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글은 누구든 다룰 수 있는 게 아닌지라, 기술을 익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작에 의존하는 시나 소설이 아닌 취재글에 있어 그 기술은 취재이며, 기사작성이며, 비판력입니다.

 

3.

“학생은 무식한 사람입니다. 무식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학생이 되는 겁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학생으로 온 것 아닙니까? 그러니 무엇을 모른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동안은 내가 무엇을 모른지도 깨닫지 못하고 지냈기 때문에 걱정이 안 되었을 뿐입니다. 이제야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니 걱정이 되는 거죠.
그동안은 집에 비가 새는 것만 보고 있었지만, 줌마네 강의를 들을 수록 그 비가 어디서 새고 있는지를 알게 될 거고,  그 비를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올 봄에 사진반 강의를 들었는데, 그 강의를 끝내고 나서 알 수 있었던 것은 한 가지였습니다. 그제야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었는지를 알았다는 겁니다.”


지난해 10월 두밀리로 떠났던 취재기행의 둘째날 강의에서 했던 말입니다.

저는 지난 4개월간 줌마네 강의를 들었던 아줌마들은 이제는 비가 어디서 새고 있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안감을 느낀다면 너무나 많은 틈새를 보아버린 순간에 느낀 막막함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한 아줌마의 말처럼 또다른 몸부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업주부로 오랜 시간을 생활했던 저 같은 아줌마들은 일거리 찾아 기웃거리기를 잘 합니다. 그것도 일종의 자신을 찾아나서는 절실한 몸부림입니다. 깨어지고 다치고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되더라도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몇 번이라도 기웃거릴 수 있다고.”


아줌마라는 이름으로 갇혀 지내던 일상의 반복으로부터 틈새를 막아볼 여력을 내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해 취재여행을 떠나기 전날 한 아줌마가 게시판에 올린 글은 이랬습니다. 

“1박2일이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닌데 한번 집 나서기 전에 준비해놔야 될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같이 사는 남자, 겉으론 잘 갔다 오라면서. 속으론 아직도 뭐가 그리 불만스러운지 자꾸 딴지를 거네요.”

‘같이 사는 남자’가 취재기행을 ‘허락’하고서도 마음으로는 유쾌하지 않는 구석을 떨어버리지 못한 게 ‘태클’이 된 셈입니다. 어쩌면 많은 아줌마들이 그런 태클에 걸려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에, 남편에, 또는 집안 일에…. 그 누구도 일부러 태클을 거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럼에도 결과적으로는 글쓰기에 몸과 마음을 집중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 그것 또한 지금의 주춤거림의 원인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줌마들의 글쓰기는 단순히 기술적인 습득의 여부 이전에, 일상에서 나와 만나는 시간의 여지 또한 중요한 듯합니다.

     

4.

그 어떤 경우에도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백번의 생각보다는 한번의 취재가 훨씬 도움이 되고, 열 번의 기사 비평보다는 한번의 기사 작성이 내 머리를 길들입니다. 그 실천을 든든하게 끌어줄 자신감도 필요합니다. 취재에 실패하고 기사가 어색해 물러선 한 걸음은, 차라리 망설이면서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것보다 낫습니다. 실패와 좌절은 반면교사가 되지만, 움직이지 않는 생각은 부담과 후회만 남긴 채 부패합니다. 


처음엔 무엇이든 글로 써 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십여 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일기가 되었든, 말로만 내뱉던 영화나 소설에 대한 감상문이든, 옆집 아줌마에게 얘기하려 했던 한 가닥 수다든…. 그것들이 글의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리를 글로 만들고, 시선을 글로 만들고, 느낌을 글로 만들다보면, 그 안에 생각이 고이게 마련입니다. 고인 생각은 처음엔 무지개처럼 제각각 빛을 낼 겁니다. 그것이 혼란을 주기도 할 것입니다. 애초의 소리가 일그러지고, 애초의 시선이 엇나가고, 애초의 느낌이 변색되더라도 그것은 곧 전진입니다.

경험에 의하면 두 번째 부침개는 첫 번째 것보다 제법 모양새가 나옵니다. 후라이팬도 기름을 잘 먹기 시작했고, 불 온도도 큰 변화 없이 수평을 유지하게 된 탓입니다. 글에 담긴 생각도 그렇게 진보합니다. 생각이 진보하면 다시 그 생각을 제대로 담을 수 있는 글의 형태를 고민하게 됩니다. 잘 익은 생각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보다 넓은 생각을 낳습니다.

그런 과정의 반복이 글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훗날 마음먹은 대로 글과 어울릴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줍니다.


5.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내 목소리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명절 때마다 몸고생에 마음고생까지 하면서도 고작해야 집에 돌아와서 남편에게 한 두 마디 푸념처럼 했던 말을 이제는 글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개인의 목소리가 불평으로 그치지 않고 더불어 고생하는 이들에게 위안과 격려와 용기로 남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내 생각을 나타낼 수 있는 독립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번에 진행하는 오마이뉴스 연재는 글을 쓸 줄 알게 된 아줌마들의 작은 의미찾기입니다. 또한 우리 이웃에 대한 관심을 한 접시의 음식이 아닌 글로써 건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연재는 사람들간의 나눔을 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전에 잡지를 만들 때 ‘아름다운재단’과 나눔 캠페인을 공동으로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유명작가나 사회 저명인사들이 잡지에 글을 게재하되 원고료를 아름다운재단에 기증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번에 진행하는 오마이뉴스 연재는 그런 글 나눔입니다. 우리 사회의 이웃이면서도, 지식을 갖지 못해, 재력을 갖지 못해,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해 자신의 아픈 가슴을 풀어내지 못하는 이들과의 공감이며 정서적 연대가 될 것입니다.     

     

집짓는 법을 알려주었다면 벽돌 쌓는 일로 끝내지 않고 직접 집을 지어보는 것이 값진 일일 겁니다. 그리고 기왕에 지을 집이라면 나름대로 쓸모 있게 짓는 것이 나은 일입니다. 이번 오마이뉴스 연재는 그동안 배운 취재글 쓰기의 연습입니다. 그러나 연습일지라도 기획회의를 해야 하고 취재를 다녀와야 하며 기사를 작성하는 수고로움은 매일반입니다. 그렇다면 이 연습을 연습으로 그치는 일은 무척 억울한 노릇입니다. 그렇게 욕심이 욕심을 낳아 시작하게 된 것이 이번 오마이뉴스 연재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름 석 자를 걸고 기사를 작성할 것입니다. 그 기사가 어떻게 평가 받을지에 대한 염려는 지금으로서는 사치입니다.

이번에 각각 맡은 기사를 중도에 포기한다고 해서 누구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매체가 지면을 비워놓고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저 역시 예정된 날 기사가 오지 않는 다고 해서 낙담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과정과 결과는 오직 지금 기사를 준비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인터뷰 약속을 하였습니다. … 제 글이 꼭 기사화 되어서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에 의견을 알아주고 동참하기를 바란다더군요. 잘 써달랍니다. 그래서 모두 모여 제게 의견을 피력하시겠답니다. 도망치고 싶습니다.“ 

때론 기사를 통해 출세를 하려는 사람도 있지만, 고통을 나누려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사람이 적다고 하더라도 기사는 그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다루어야 합니다.

  

한번쯤은 사랑하는 이를 주기 위한 선물을 골라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선물을 고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아니, 그 선물을 직접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결국 그 선물은 만드는 사람에게도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수강 첫 마음에 담았던 자기실현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이것은 기대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도 아니면 돈 버는 지름길을 알려주지 못한 이가 뒤늦게 사기치는 것이거나….

 

6.

건투를 빕니다.

많은 인연들이 돕고 있습니다.

줌마네는 모든 이들이 서로의 동지입니다. 


                             겨울비에 젖은 시내를 보며  노을이가 세풀  (2003년 2월)



편지를 썼다. 
그 해 재미있게 놀았다.
오마이뉴스에 글 쓰는 아줌마들과, 글 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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