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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0+31

옷 한벌과의 결별

 

얼마 전 회사 동료로부터 헌 옷을 한 벌 얻었다. 잿빛 스웨터. 남편이 입던 옷인데, 예전에 <작은이야기>에 소개된 아이들을 돕겠다고 가져 온 옷이었다. 뒤쪽 어깨 부분에 올이 풀려 손가락 하나 정도 들어갈 구멍이 나긴 했지만, 말끔했다. 그 구멍도 재주 없는 내 바느질 솜씨로 몇 번 꿰매었더니 돋보기로 구멍 찾겠다고 덤비지 않는 이상 쉽게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옷걸이에 걸린 그 옷을 보면 참 마음에 든다. 우선 옷 모양이 예쁘다. 옷깃을 세울 수도 있으니 목도리를 두르고 옷깃을 세우면 한 폼 한다. 앞에 달린 지퍼를 올리면 목도 따뜻하게 감쌀 수 있다. 한편으로는 헌 옷이라는 것 때문에 마음도 편하다. 새 것이었으면 아낀다고 오히려 행동이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을 텐데, 그만큼 내 몸을 좀 더 자유롭게 해 주었다. 회사에 출근하면서 남들처럼 양복을 입고 다니지  않으니, 그 옷은 훌륭한 출근복이 된다. 


그 헌 옷 한 벌을 보며 생각한다. 내게 옷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옷걸이에 다른 겨울옷들이 걸려있다. 몇 년 전엔가 구입했던 쑥색 가디건은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았다. 올 겨울 초 구입했던 흰색

스웨터도 손빨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정작 겨울 들어서는 제대로 입어보지 못했다. 혼자 사는 독신남이 손빨래를 하려니 큰 맘 먹지 않고서는 좀처럼 쉽지 않다. 이밖에도 몇 벌의 옷들이 있다. 어머니 말씀대로 요즘 옷이야 헤져서 못 입지는 않는 듯싶다.


내 경우 밖으로 나다니기보다는 주로 사무실에 근무하다 보니 따로 많은 옷이 필요 없다. 사무실에서야 스팀이 나오니 여느 옷 한 벌만 있으면 된다. 지난해 샀던 외투가 가방을 맨 어깨부분이 해지고, 손목 부분도 닳긴 했지만, 출퇴근길에만 입으면 되니 그리 큰 불편은 없다.

그렇다면 내가 너무 많은 옷들을 가진 것은 아닌가.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이사를 다니면서 생각했다.

‘몇 년 동안 쓰지 않은 물건이면 앞으로도 쓰지 않을 것이다.’


주문처럼 외우는 이 말은, 혼자 사는 이들이나 살림해 본 이들이 겪는, 쉽사리 버리지 못하는 것을 이겨보기 위한 자기 최면이기도 하다. 지금도 옷장 안에 분명 몇 년 동안 입지 않았던 옷들이 있다. 언젠간 입겠지 하고 쌓아둔다. 그럼에도 매년 옷을 몇 벌씩 구입했다. 혼자서 옷 고르는 눈도 없을 뿐더러 그리 옷에 대한 욕심이 없기 때문에 옷을 잘 사진 않지만, 그래도 올해엔 몇 벌의 옷을 구입했다. 입지 않는 옷이 있는데, 그럼에도 옷을 구입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렇다고 내가 유행 따라 사는 놈도 아닌데 말이다. 그쯤에서 한 가지 결심했다.


‘내년엔 내가 입을 옷은 구입하지 말자.’

옷을 어떻게 입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첫 인상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옷을 구입하지 말아야지 싶다. 옷을 조금 못 입더라도, 옷이 조금 낡았더라도 그냥  살아보려 한다. 내 삶을 자유롭게 살려면 남의 시선으로부터 가능한 비껴서야 한다. 아니,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일일이 몸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비록 옷 때문에 첫인상이 후줄근하더라도 다른 무엇으로 만회하는 게 낫다.  


내년에 옷을 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내가 옷을 여러 벌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언젠가는 내가 실현해 나갈 삶에 대해 덜 고통스러운 생활을 체험 삼아 해보는 것이다. 덜 쓰는 삶, 단순하게 사는 삶, 그 삶을 지금부터 조금씩 내 생활로 받아 안고자 한다.    


지난 11월 26일 명동에서는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Buy Nothing Day)’ 캠페인이 있었다. 녹색연합이 주최한 이날 캠페인은 적어도 하루만은 아무 것도 사지 말자는 것이다. 이 캠페인은 애초 1992년 캐나다의 테드 데이브라는 광고계에 종사하던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다. “충분할 만큼 충분하다”는 좌우명을 가진 그 광고장이가 과소비를 없애 보자는 취지로 시작한 이 캠페인은 미국 캐나다 등 13개국에서 뜻 있는 이들이 동참하고 있다. 이 캠페인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물건을 구입할 때 다음과 같이 내용을 자신에게 물어본다.


나는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는가? 나는 그것이 정말로 필요한가? 내가 직접 만들 수는 없는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재사용, 수선 또는 재활용할 수 있는가?  공정한 무역을 통해 생산된 제품인가? 지역에서 생산된 것을 살 수 있는가? 그 물건을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가? 더 나은 도덕적인 대안은 없는가? 


이들의 주장은 우리들이 무심결에 하는 소비행위로 인해 우리의 삶이 질적으로 개선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자는 의미를 담겨 있다. 자본의 광고이든, 주변인들과의 허영끼 든 경쟁심리든, 누군가에 의해 물건을 구입하는 않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아울러 모든 상품이 곧 지구생태계와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 필수품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사치품이라면 생각해 볼 대목이다.


어느 한 개인이 기계 문명, 현대 문화에 맞서 싸우는 일이 때로는 허무해 보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외국의 어떤 이가 쓴 글은 말한다. “기계 문명과 현대 문화에 어떤 한 개인이 맞서는 싸움은 현대 문화 전체의 힘에서 ‘한 사람 분’의 에너지가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곧 물질주의와 공격적인 기술문명의 힘을 약화시키는 길이라고. 비약해 보자면, 그런 싸움을 내년엔 옷 사지 않는 일로 실천해 볼 참이다. (200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