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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0+31

마음이, 생각이, 꿈이, 몸이 예쁜… 여인


 

오랜 여행을 떠났습니다. 푸른 하늘도, 높은 산도 없는 곳으로 먼 여행을 떠났습니다. 삶이 그러했을까요? 한번쯤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을까요? 삶이란… 그럴 때가 있습니다. 훌쩍 떠나버리고 싶을 때….

아니, 이번 여행은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평온한 삶이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가지고 사는 듯 했습니다. 주말이면 만나 술 한잔 나눌 친구들도 있고, 누구 눈치 보지 않고도 혼자 발가벗고 누워도 좋을 내 공간도 있고, 배고프지 않을 만큼의 먹을거리도 있었지요. 정히 심심하다면 비디오를 봐도 그리 나쁘지 않을 일상까지.

그런 일상이었는데 어느 날 마음이 훌쩍 여행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몇 달…. 달을 보고 내딛던 발걸음은 달그림자도 밟지 못한 채 지치고 피곤한 기색으로 터벅거리며 집 골목으로 들어섰습니다.


사랑…. 

그런 것이지요. 무엇인가 부족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요. 무엇을 채우자고 사랑을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저 사랑은 그것만으로 족한 것이지요. 사랑은 그것만으로 사랑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지요. 무엇이든 내주어도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인 것이지요.

마음이 어찌 그것을 알았을까요. ‘앞선 사랑’이 채 흔적을 지우기도 전에, 어찌 ‘다른 사랑’을 찾아 발길을 재촉했을까요. 생각하면 그 마음이 예쁜 것인데, 이제 돌아온 그 마음은 또 얼마나 말을 잊고 지낼까요.

       

여행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습니다. 마음이 예쁘고, 생각이 예쁘고, 꿈이 예쁘고, 몸이 예쁜…. 한동안 그 여인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인은 세상과 대화하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어떻게 말을 꺼내고, 설득하고, 또는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 여인은 예쁜 생각도, 꿈도 들려주었습니다. 내 집 앞 조그만 텃밭에 열린 풋고추같이 풋풋하고 알찬 꿈이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은 여인에게 한없이 기대었습니다. 제 몸 생각도 않고 오롯이 여인에게로만 기울었습니다.

그 앞에 선 마음을 위축되게 만드는, 스스로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드는 그 여인을 두고, 감히 무엇을 생각이나 했을까요? 오직 아름다운 여인을 만난 것에 감사했을 따름이지요.   


텃밭에….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집 앞 작은 텃밭 그 한 구석에서 옥수수가 자라고 있더군요. 붉은 수염을 내놓은 옥수수 몇 개가 가느다란 옥수숫대에 몸을 맡겼습니다. 통통하게 오른 옥수수가 그 가녀린 옥수숫대에 붙어 있어도 위태롭지 않고 오히려 풍요로워 보입니다. 새삼스레 옥수수를 안고서 자란 저 넓은 잎사귀가 대견스러워 보입니다. 저들처럼 한 몸이더라도 제 몫이 있을 터인데, 여인에게 달려갔던 마음은 여인에게 무슨 몫이었을까 싶습니다. 어떤 인연이었을까 싶습니다.

어떤 이는 그럴 테지요. 미욱하게 그런 것을 헤아리고 있냐고. 그렇겠지요. 미련할 일일테지요. 제 마음을 달래자고 헤아려보는 셈속이지요. 스스로 위안삼아 보자고 떠올려보는 인연이지요. 어쩌면 그쯤에서 그 마음에게 여인은 어떤 인연이었을지도 생각해 볼 만하겠지요.


여인은…. 

조목조목 말합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일생을 바쳐서 사랑할 만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그 사람이 아프면 모든 것을 팽개치고라도 그 사람만을 위해 사는 그런 사랑을 찾고 싶다고. 그 순간에도 마음은 여인의 주위를 맹맹 돌았습니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을 터인데도 무엇을 바랐는지 여인의 눈동자를 보며 끝까지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그 얘기를 다 마음에 담아두었습니다. 스스로가 어떻게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아니 알았더라도 어찌 달리 생각해 볼 틈조차 없었겠지만. 문득, 비가 내렸으면 좋았을 여행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에겐 빗물처럼 쓸려가 버렸으면 좋았을 얘기였으니까요.      


지금도….

마음은 여인에게 달려갑니다. 아직 여행이 끝나지 않았다고 텃밭에 아무렇게나 자란 풀들에게 말합니다. 제자리 아닌 곳에 서서도 잘 자라는 너희들처럼, 제 마음도 여인의 마음에서 다시금 잠시라도 뿌리를 내리고 싶다고. 어느 날 아침 단 한번의 손길에 뿌리 채 뽑혀 나가더라도, 그 여인의 마음 안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다 큰 나이에 떼를 씁니다.

오래갈 듯 합니다. 여인이 원하지 않았더라고 먼저 다가선 마음이기에, 첫 마음이 무엇을 바라자고 다가선 것이 아니었기에.

아무것도 잃은 게 없으나, 모두를 잃어버린 듯해 마음은 여인에게서 좀처럼 떠나오지 못할 듯합니다. 한동안 서성거릴 듯 합니다. 하루 이틀… 날로 헤아릴 것이 아닙니다. 한 달 두 달… 시간으로 손꼽을 일이 아닙니다. 여인에게 내렸던 마음의 뿌리, 그 마지막 잔뿌리 한 올이라도 거두지 못하는 한…. 거두고자 하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 퍽 오래 떠돌 듯 합니다.  

         

소유란…. 

세상에 소유한 것들보다 소유하지 못한 것들이 더욱 많은데도, 그 소유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별 욕심이 없음에도 여전히 여행에서 만난 그 여인만은 소유하고 싶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내 놓아야 할 지…. 어디까지 비워야 채울 수 있을지…. 그럼에도 채우지 못하는 것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는 오늘, 지금 무엇을 내 놓아야 할까요. 다 내 놓아도 여인을 만났던 첫 마음만은, 아름다운 여인을 향했던 그 마음만은 내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겨울, 지난 여름에 쓴 편지는 이제야 마음에 닿습니다.


… 

마음 안에 그런 텃밭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인을 반길 수 있는 텃밭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훌쩍 떠나버린 데도 머무는 동안만이라도

밝은 웃음 쏟아내 생명을 가꾸고 우주를 가꾸는

그런 여인을 반길 수 있는 텃밭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인이 떠난 빈자리를 눈물로 채우더라도…

그것마저 꿈이고 우주이고 내 마음인

텃밭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일상…. 

일상이지요. 여행이란 그런 것이지요.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있는 것. 일상에서 한발짝 비껴나 있는 것. 그러니 언제든 이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지요. 여행은 일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여행은 돌아오게 마련이지요. 집을 오가는 한재길 한편에 앙상한 가지만 남은 플라타너스들이 서 있는 그 길로. 마음만큼이나 전깃줄에 의해 복잡하게 갈려진 내 창문 앞 하늘밑으로.

허나, 마음은 그것을 알았을까요. 사랑도 여행이라는 것을…. 즐거웠던 여행일수록 일상에서 에너지를 더 많이 가꾸게 마련이지요. 사랑도 여행이지요. 아름다운 사랑일수록 일상에서 더 많은 웃음을 피워내게 마련이지요. 그런데도 오늘은 채 흘리지 못한 눈물만 가득합니다. 마음이 무거워 플라타너스 아랫길로 걸음을 옮길 여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이번 여행이, 이번 사랑이 일상에 가르쳐 준 것들인가 봅니다. 여인이 내게 남긴 인연의 흔적인가 봅니다.


다시 떠나지요. 여행을 말입니다. 마음이 예쁘고, 생각이 예쁘고, 꿈이 예쁘고, 몸이 예쁜 그 여인에게로…. 아름다운 여인에게로… 다른 것들을 그만큼 버리면 되겠지요. 그 안에서, 내 여행 안에서 여인이 조금이라도 행복하길 바랄 뿐입니다. (2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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