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썸네일형 리스트형 어떤 감사 찬드라 쿠마리 구릉. 평범한 이 네팔 여성이 우리 사회에 알려진 때는 2000년 3월이었습니다. 93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온 그는 음식값 문제로 생긴 오해 때문에 경찰에 연행되었습니다. 우리말이 서툴렀던 찬드라는, 정신병원으로 넘겨져 6년여 간 강제투약에 모욕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찬드라는 우연히 발견돼 불법감금 상태에서 풀려났고, 정신병동 생활을 끝내고 고향 네팔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찬드라의 ‘특별한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딸의 실종 층격에 오랫동안 앓다가 빚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로 인해 찬드라는 이웃들로부터도 싸늘한 시선을 받았습니다. 최근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과 ‘녹색평론’에서는 참회의 성금을 모아 찬드라에게 전달했습니다.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한국.. 더보기 나는 아니더라도 그의 연기에 즐거워했던 사람들 가운데 정작 ‘커망아웃’ 이후 그의 고통은 얼마나 나누었을지… 2000년 가을 ‘커밍아웃’한 홍석천님은 그 후 1년 여간 방송에 출연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을 위해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가수 이상은의 격렬한 춤에 반해 연극영화과에 들어간 석천님은 영원한 은사 최형인 교수를 만나 연극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적어도 한 사람은 그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어머니가 딸만 셋 낳아 아버지가 이복형을 둔 일, 중학교 때 남학생들로부터 성폭행 당한 일, 연기자로서 가진 얼굴 콤플렉스, 여성보다 남성을 더 좋아한다는 성적 정체성… 그 모든 고백은 최 교수와 나눈 석천님의 고통이었습니다. ‘커밍아웃’ 이후 동성애 단체가 주관한 행사에 참석했던 그에게 언론에서 물었습.. 더보기 명함의 폭력 일용직으로 근무하는 어떤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명함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는 일이 건설 현장의 막노동이다보니 명함을 만들어도 새겨 넣을 회사이름이나 직책이나 직위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명함을 가질 기회가 생겼습니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만든 건설회사에서 직책을 맡게 된 것입니다. 회사 이름과 함께 직책이 새겨진 명함을 만든 그는 그 기쁨에 가족들을 모아 파티를 열었습니다. 다음 날엔 고향으로 내려가 고향 사람들에게 일일이 명함을 돌렸답니다. ‘금의환향’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가벼운 명함 한 장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직장인들이라면 으레 갖게 되는 명함이지만, 명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습니다. “나 명함 하나 만들어줘요. 그럴 듯한 명함 하나 만들어 아이들.. 더보기 이전 1 ··· 8 9 10 11 12 13 14 다음